커피잔 속에서 자아를 찾았어요

갑자기 이렇게 말하면 정말 우습고 황당하게 보이겠지만.. 제 자아를 찾았어요. 제게 필요한 건 절 사랑해줄 애인도 아니고 용기사도 아니었어요. 아아.. 이런 소릴 하는 지금도 그 느낌이 생생하네요. 사실 요 며칠 바빠서 커피를 못 마셨답니다. 인스턴트도 있고.. 편의점도 있지만.. 그게 아니에요.  그건 커피의 맛과 향을 흉내낸 것이지 제가 사랑하는 그게 아니었지요.

알 수 없는 두통과 갈증을 느끼며 집에 왔어요. 식사를 하고 늦은 시간 작업실로 나갔네요. 핸드 블랜더에 조금 남아있던 커피를 털어넣었어요. 끝이네요. 조금 많이 슬펏나 봅니다. 어? 그런데 블랜더를 돌리던 손등 위로 물이 한 방울!? 어디서 물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. 그런데 저 울고 있네요. 표정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물이 멈추질 않아요.

물이 끓었어요. 커피가 내려옵니다. 그리고 인천레이드에서 건진 커피 잔에 조금 덜어냈어요. 커피가 입에 닿은 순간.. 새로운 세상이 열렸어요. 그 동안 제가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.. 왜 그렇게 외로웠던 것인지.. 제가 무엇을 갈망하는지.. 모든 게 떠올랐어요. 내게 필요한 건 애인이 아니었어요. 날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아니었어요. 그저 하루 피로를 씻어주는 커피 한 잔. 내 취향에 꼭 맞는 그 한 잔을 내릴 수 있는 여유.

식도를 넘어가는 그 감미로운 향취와 함께.. 과오를 삼키고 새로운 내일을 만나는 준비를 할 시간. 제가 갈망하던 게 이거였나봐요. 말 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합니다. 오늘은 아무리 바빠도 커피를 살 겁니다. 하다못해 별다방이라도.. 시간이 정 없으면 마트라도 가서.. 날 사랑해 주는 건 남이 될 필요가 없어요. 나 자신이 아니면 안 되는 거였어요.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요. 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는지, 이제 알 거 같네요.

일은 꾸준히 진행 중이에요. 아마 오늘 이 기분을 내일 맛 보기는 힘들겠지만.. 아니 어쩌면 다시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 할지도 모르겠지만.. 좀 더 스스로에 온화해져 볼께요.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커피맛은.. 어디 유명한 까페가 아니라.. 작업실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며 직접 내리는 그 맛이었네요.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요. 왜 난 스스로에게 그런 가볍고 쉬운 상을 주지 않았던 걸까요. 그러면서 왜 그렇게 엄한 욕심만 내고 있던건지..

이제부터 모든 일이 잘 풀릴거에요. 이런 마음가짐으로 세상에 안 될일은 없을 테니까..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테니까.. 내 주변에 있는 정말 소중한 것들을 다시 잊지 않을 테니까.. 작업실을 굴러다니는 프라모델. 내 방에 굴러다니는 각종 책들. 그리고 게임들. 모두가 날 기다리고 있어요. 나와 함께하길 기대하고 있어요. 그리고 내가 그 모든 것을 원하고 있어요. 그러니까 이제 다시 일 하러 갑니다. 모두 잘 될 테니까요.

by Wind | 2009/01/23 01:23 | 사는 이야기 | 트랙백 | 덧글(12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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Commented by 피노 at 2009/01/23 01:39
축하드려요~
Commented by Wind at 2009/01/25 22:27
넵. 감사합니다.:D
Commented by 앞치마소년 at 2009/01/23 02:29
모두 잘 될 겁니다.
Commented by Wind at 2009/01/25 22:27
그럼요 저만 잘 하면 다 잘 될 거에요.OTL
Commented by Loan at 2009/01/23 09:42
이쁜 사랑 하세요...;;;;
Commented by Wind at 2009/01/25 22:27
오늘 냉장고 냉동실에서 숨겨진 커피를 발굴 했어요.
내려보니.. 앗! 케냐AA!!!!
Commented by 성큼이 at 2009/01/23 10:01
그리고 다시 카페인 쇼크 크리인 겁니까? ㄷㄷㄷ
Commented by Wind at 2009/01/25 22:28
술만 안 마시면 괜찮을 거 같아요. 하하하핫
Commented by 림rym at 2009/01/23 11:25
잘 될거에요:)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신데 :)
Commented by Wind at 2009/01/25 22:28
요는 본인의 노력과 근성이죠
Commented at 2009/01/24 14:05
비공개 덧글입니다.
Commented by Wind at 2009/01/25 22:29
아아.. 커피는 무생물입니다. 사랑에 빠지는 건 생물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요.
말씀대로 되면야 베스트이겠습니다만.. 그 전에 노력이라는 대가를 버쳐야 할 테지요.: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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